시와 나의 넋두리

시 한편 - 뒷굽

무당 거미 2013. 11. 4. 08:22

뒷굽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76>뒷굽

 

 

 

뒷굽 
                                  ―허형만(1945∼)

구두 뒷굽이 닳아 그믐달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수선집 주인이 뒷굽을 뜯어내며
참 오래도 신으셨네요 하는 말이
참 오래도 사시네요 하는 말로 들렸다가
참 오래도 기울어지셨네요 하는 말로 바뀌어 들렸다
수선집 주인이 좌빨이네요 할까봐 겁났고
우빨이네요 할까봐 더 겁났다
구두 뒷굽을 새로 갈 때마다 나는
돌고 도는 지구의 모퉁이만 밟고 살아가는 게 아닌지
순수의 영혼이 한쪽으로만 쏠리고 있는 건 아닌지
한사코 한쪽으로만 비스듬히 닳아 기울어가는
그 이유가 그지없이 궁금했다

수선공은 물건의 질병을 고쳐주는 전문의사다. 문짝에 ‘구두병원’이라고 적혀 있는 구두 수선집도 있다. 치과의사가 어떤 자리에서건 무의식중에 상대의 입속을 보게 되듯 구두 수선공 눈에는 구두가 우선 보일 테다. 구두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자부하는 베테랑도 있을 테다. 구두 굽이 고르게 닳는 사람은 드물다고 한다. 구두 굽이 닳은 형태는 구두 주인의 걸음걸이 습관, 삶의 자세를 드러낸다. 발을 질질 끌면서 걷는지, 왼쪽이나 오른쪽,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걷는지.

구두 수선집에서 “참 오래도 신으셨네요”라는 말을 들으면 삐딱하게 ‘남이야 오래 신든 말든! 굽이나 갈아주소!’ 생각할 수도 있는데 화자는 참 성정이 곱다. 그렇지만 무르기만 한 사람은 아니다. 구두 굽이 왼쪽으로 닳으면 ‘좌빨’이라고, 오른쪽으로 닳으면 ‘우빨’이라고 할까 겁난다는, 이 뼈 있는 농담! 화자는 사소한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색안경을 쓰고 보면서 과장되거나 엉뚱한 갖다 붙이기를 하는 세태를 꼬집는다. 구두 뒷굽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과학적 이유를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화자는 그 물리적 흔적에서 ‘영혼이 한쪽으로 쏠려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정신적인 흔적을 찾으려 한다. 세상의 평탄한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 모퉁이만 기우뚱 밟아 온 게 아닌가, 제 삶의 행로를 돌이켜도 본다. 일상의 사물에서 영혼을 찾으려는 시인의 자세!

황인숙 시인

 

ps. 오래 전 비오는 날에 발이 축축하여 살펴보니 구두에 빗물이 들어와 양말이 다 젖었었다. 뒷굽이 닳고, 약간은 낡았지만 내 몸과 발을 편안하게 해주고, 나의 깃대를 세워 걸어가게 해 주었던 낡은 구두에게 미안했다. 그런 비오는 날이 생각나는 시이다.

  오래된 것, 지나온 것, 낡은 것이 때로는 그립고 소중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