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나의 넋두리

시 - 무논의 책

무당 거미 2013. 6. 23. 23:44

 

무논의 책

 

아버지는 멋진 책을 잘 만들었다
봄과 여름 사이 오월의 논에 아버지
산골짝 물 들여와 소와 쟁기로 해마다
무논의 책 만든다

모내기 전의 무논은 밀서(密書)다
하늘과 땅이 마주보는 밀서 속으로
바람이 오고 구름이 일어나고
꽃향기 새소리도 피어나는 무논의 책

어머니 아버지 책 속으로 걸어가면
연둣빛 어린 모가 따라 들어간다
초록 치마를 펼쳐놓은 책 위로
하늘이 구름 불러 햇볕과 비를 앉히고
한철 또록또록 그 책 다 읽고나면
밥이 나왔다
무논의 책이 나를 키운다

―이종암(1965~ )


	가슴으로 읽는 시 일러스트

모내기 전 논을 갈고 써레질을 해 놓고 논두렁을 하면(논물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논 가장자리를 잘 메워 단장하는 것을 논두렁한다고 한다) 빨래한 새 옷처럼 논도 새것이 된다. 흙물이 가라앉으면 거기 하늘이 내려와 반짝인다. '구름이 일어나고 꽃향기 새소리도 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심오한 책이다. 어머니 아버지 어린아이 책 읽는 소리처럼 모를 심어나가고 그 책에 엎드려 땀 흘려 몇 번이고 읽어내면 일용할 밥이 나온다. 거기 하늘의 햇빛과 바람과 풀잎들이 적어나가는 문장은 하늘과 땅의 이치를 알려주는 성인의 말씀과 다름없었으리라. 책장의 책보다 훨씬 아름다운, 훨씬 실용적인, 그러나 읽기에 고된 경서(經書)가 아닐 수 없다.

지금 한창 모내기 끝난 논의 벼들이 뿌리를 내리고 생기 돋아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빼어난 문장처럼 반짝여서 삽을 어깨에 멘 할아버지 금니도 빛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6/20/2013062005632.html

(조선일보.2013.06.21.금/A면30)

 

ps. 나의 책에는 논두렁을 하고 난 후 논에 써레질을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물을 잡을 수없고 써레질한 물러진 흙으로 논뚝을 바를 수 없다. 한해의 여정을 다지는 일이다. 

  논두렁에 한삽씩 땀방울을 올려 놓고, 어제의 기억들을 자근자근 밟아 주며 다진다. 그런 후 기억을 가두듯이 삽뒤로 흙 시멘트를 한다. 가을까지 높은 빌딩이 만들어진다. 그곳에는 귀뚜라미가 울고 개구리가 뛰어 논다. 메뚜기와 반디불이가 길을 만들고, 미꾸리지가 밀물을 일으킨다. 나는 그곳에 서 있다. 아버지가 완성하지 못한 가을을 올해도 만들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