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진안군 마이산>
- 2008년 7월 23일 수요일 맑음
- 높이 :馬耳山 숫봉 674(더뽀족함, 우측), 암봉667m(조금뭉텅, 좌측)
전라북도 진안군에 있는 마이산을 들릴 기회가 되었다. 마이산은 바위산으로 마치 건축물에 부어 넣은 콘크리트처럼 보였다. 멀리서 봤던 두 개의 봉은 가까이에서 보니, 우뚝 솟은 바위산일 뿐이였다. 그러나 어떻게 긴 세월동안 이러한 모습으로 지탱하여 왔고, 또 주위에 쌓여 있는 탑들의 모습과 정성이 산의 가치와 역사를 짐작케 하였다.
매표소를 지나 작은 저수지가 있고, 입구 주차장이 또 있다. 그리고 다가가면 바로 마이산 암봉 아래에 많은 탑들이 쌓인 속으로 걸을 수 있다. 거기에는 섬진강의 발원지라는 글귀가 적힌 작은 우물이 있다. 물을 마셔보니 그다지 차갑지 않았다.
마이산이 어떻게 오랜 비바람과 폭풍에 지켜왔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작은 돌과 굵은 돌의 조화로 무너지지 않고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처럼 세상에 모든 이치가 음양의 이론처럼 작고 큰 것과 높은 것과 낮은 것, 낮과 밤, 부침, 그리고 사랑과 미움처럼 조화로운 것 같다.
천지탑에서 한 가지 소원을 빌면 이루어질 것이라고 같이 갔던 분이 말씀을 했었다. 그러나 나는 빌지 않았다. 그곳에서 사진을 몇 장 찍고 내려왔다. 안내해 준 그분들의 고마움을 뒤로 하고 안동을 향하였다.
진안군청
진안군청앞 고목~
멀리 보이는 마이산
마이산 도로표지판
마이산 도립공원 주차장
진안군 마이산 석탑
마이산탑사
마이산에 탑을 쌓았다는 이갑룡처사 상
진안군 입구
진안군 삼거리(시장입구)
<인터넷 사이트에서 가져온 마이산에 얽힌 글들>
◎ 마이산이 된 산신부부
아득한 먼 옛날 큰 죄를 지어 하늘나라에서 쫓겨난 한 산신 부부내외가 이 세상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 세상에서 두 아이를 낳고 기르며 살면서 수 억겁 동안 속죄의 시간을 보냈다. 오랜 속죄의 날들을 보내고 드디어 하늘 천상계로 승천의 기회가 열렸다. 이때 남편 산신이 아내 산신에게 말했다.
"이제 하늘나라로 다시 올라갈 때가 되었소. 그러나 우리가 승천하는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띄면 부정을 탈것이니 사람들이 깊이 잠든 한밤중(자시11시~01시)을 택해 승천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그러나 아내의 생각은 달랐다.
한밤중은 너무 무섭습니다. 게다가 밤중에 일을 치르자면 너무 피곤합니다. 그러니 푹 자고나서 이른 새벽에 올라가십시다. 누가 꼭두새벽에 잠 안자고 우리들이 승천하는 것을 훔쳐보고 있겠습니까?
남편 산신은 일을 그르칠까 걱정되었지만 아내 산신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오랜 속죄의 날들이 무위로 돌아갈지도 몰라 불안했지만 이튿날 새벽에 승천하기로 마음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새벽, 산신 부부는 마침내 승천을 시도했다. 하늘을 향해 산이 쑥쑥 솟아가고 있을 때 아랫마을의 어느 부지런한 아낙네가 치성을 드리기 위해 정화수를 뜨려고 우물을 찾았다가 그 현장을 목격하고 말았다. 아낙네는 생전 처음 보는 그 광경에 놀라 비명을 질러댔다.
이 소리에 부정을 탄 산신부부는 결국 꿈에도 그리던 승천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져 지금의 암수 마이봉이 되었다고 한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남편 산신은 아내 산신을 걷어차고는 두 아이를 빼앗아 버렸다는 뒷얘기도 전한다. 그래서일까? 지금의 수마이봉(해발 673m)은 두 아이를 거느리고 있는 듯 한 형상을 취하고 있고, 암마이봉(667m)은 수마이봉을 등지고 앉아 한없이 고개를 떨 군 채 후회하는 듯 한 형상을 취하고 있다.
이런 내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옛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기이한 봉우리가 하늘 밖에서 떨어지니
쌍으로 쭈빗한 모양이 말의 귀와 같구나.
높이는 몇천 길이 되는 데
연기와 안개 속에 우뚝하도다.
우연히 임금의 행차하심을 입어
아름다운 이름이 만년에 전하네.
중원에도 또한 이름이 있으니
이름과 실제가 서로 비슷하도다.
천지조화의 교묘함은 실로 끝이 없으니
천지가 혼돈했던 처음 일을 생각하도다.
-김종직(성종때의 성리학자)
옛 시인의 노래에 등장한 임금은 바로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이다. 태종이 남행해서 마이산이라는 이름을 짓기 전에 이산은 신라 때 서다산(서쪽에 많은 산들 중에 가장 아름답게 쏫은 산!, 쏫았다, 섯다) 그리고 고려 시대에는 용출산(용이 하늘로 쏫아 오를 듯 한 기상) 이라 불렸다. 그리고 조선의 태조는 속금산(금을 묶어 놓은 금덩어리 산! 땅속에서 쏫아난 산 )이라고 이름 붙였다고도 한다. 이중에서 서다산과 용출산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즉 서다를 이두식 표기로 볼 때 그 뜻은 '섯다'이고 그 한문식 표현은 용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 http://www.maisantapsa.co.kr/
◎ 축조사 이갑룡처사
자 : 갑룡 호 : 석정 (본명: 이경의, 자: 갑룡, 호: 석정)
1860년 임실군 둔덕면 둔기리에서 전주이씨 효령대군 16대손으로 출생했던 석정의 본명은 이 경의 호는 이갑룡이라 한다. 구한말 시기적으로 어려운 때에 지혜는 총명했지만 가난한 양반 집안이므로 서당에 다니지 못하고 창호지 틈으로 세어 나오는 글소리로 학문을 익혔으며 군불에 나무를 집히고 앉아서 나무가락으로 땅바닥에 글을 쓰며 틈틈이 일하시면서 공부에 열중하셨다.
아주 어릴 적에 갓 돐을 넘기시고 제사 날에 조상 제사상에 홀로 술을 올리고 절을 하면서 침묵과 함께 기도를 한참 동안하셨다 한다.
남달리 어릴 적부터 효성이 지극했으며 같은 동내에서도 이 경의를 이길 자가 없었다 한다. 어릴 적부터 효성이 지극한 갑룡은 부모님이 자리에 누워 임종 하실 때 이갑룡은 자기의 손가락을 조금 잘라 피를 먹이시어 약 석달 간을 더 사시게 하셨다 한다.
16세 때 부모님을 여의시고 부모님 묘소 옆에서 움막을 짓고 3년동안 시묘살이를 하시다 인생의 삶과 죽음의 인생 허무무상을 탄식 하시다가 19세 때 시묘살이를 마치고 전국을 만행 하시면서 속세를 떠나셨다 한다. "疊疊山中, 萬康漁萬來"라 “오직 홀로 산과의 대화요, 강을 건너도 또한 물고기와의 대화로다”
외로움을 달래며 이산 저산 이절 저절에서도 자리 잡지 못하시고 결국 고향에서 농사나 지으며 인생을 살아야지 하며 전국을 누비시다가 거창에서 장수로 임실 둔덕으로 넘어가실 무렵 어느 두 봉우리가 이 갑룡을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가 1885년경 나이 25세 되던 해 젊음을 이곳에 묻으라 하신다. 유․불․선에 바탕을 두고 龍華世界의 실현이 이상적이라 믿고 구도의 행각 끝에 수도에 들어갔다.
마이산에서 남자 산이라는 지리산이 200리, 여자 산이란 계룡산이 200리 그 한복판의 마이령봉은 남녀 두 봉우리가 역역하고 그 절묘함이 어느곳에 비 할 수 없어 그 정기로 사바세계를 개척 하리라 마음먹고 중생 구제를 위해 고행을 자처하며 1기,2기, 쉬지 않고 탑을 쌓기 시작했다. 세속과는 완전 등진 채 낮에는 돌을 날랐고 밤에는 기도 하다 자시에 돌탑을 하루에 한층 씩 30여년동안 인간의 괴로움을 달래기 위해 108기의 탑을 쌓으면서 108 번뇌를 해탈 하고자 108개의 석탑을 구상 자연석을 탑촌으로 하나둘 올려놓으면서 뭇 중생이 짖는 죄를 대신해 비는 기도로 일관 하며 탑을 완성될 동안에는 사람이면 고독을 느껴서라도 하산의 길을 떠나 세속에 묻혔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의 힘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큰 돌로 기초를 쌓고 그 위에 돌탑을 완성 했으니 이미 석정은 그때부터 영의 힘에 의 그 같은 일을 했을 것이라고 탑을 보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더욱이 받침대(기둥) 하나 없이 가파른 탑신을 축지법으로 오르내리며 누구의 도움 하나 빌리지 않고 돌탑들은 전국의 명산 각지를 순례할 때 산항에 기도하고 돌아올 때 한 덩어리의 돌이라도 배낭에 지고 와서 탑신에 섞어 쌓았다고 한다.
이러한 자연석 석탑은 세계 조탑사에 비추어 그 유예를 찾아볼 수 없는 자연석으로 탑군을 축조 하였는데 주탑인 천지탑은 같은 형태로 원형의 기단부로 부터 70%도 정도로 타원형인 포물선을 그리며 유유히 뻗어 상륜부에 해당하는 윗부분은 잔석으로 괴여 힘이 눌리고 흔들릴 때 쿳숀 역할을 하고 자연 판석을 그대로 올리고 높이 15m로 쌓아올렸다 한다.
원추형으로 쌓은 두 천지탑은 알맞게 조화를 이룬 수법은 역학적 인면에서 보다 자연석으로 조탑 했다는 기발하고 독창적인 착상에 경탄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탑의 신비와 가치는 그러한 축조 기술보다 하나하나의 조형미와 전체적인 조화미에서 오는 감동인데 펑퍼진 기단부로 부터 유연히 뻗어 오른 선의 미와 육중한 탑신의 중량감에서 탑봉의 예각이 주는 섬세하면서도 신비한 아름다움을 주는 법열이다.
더군다나 돌로 이어지는 패턴은 절묘함과 처연한 아름다움을 더하고 높고 낮고 크고 작은 탑의 배치는 단순한 가운데 다양한 변화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모든 탑군은 저마다 입부리를 하늘을 향해 애절한 염원을 소원하는 듯하다.
자연석과 같은 암반으로 형성된 마이산의 산세를 이용하여 이 공간에 높고 낮고 체감율이 뾰쪽한 탑과 원추형의 탑을 알맞게 조화시켜 황홀하게 구조한 배치의 솜씨는 범 중생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천지탑, 일광탑, 월광탑, 약사탑, 중앙탑, 월궁탑, 용궁탑, 신장탑, 등 배열은 팔진도법을 적절히 이용하였으며 각각 다른 탑형은 음․양의 이치를 살렸으며 높고 낮은 구조는 환생과 오행의 이와 조형미의 극치를 이루고 신비의 전경을 이루게 했다.
이와 같은 조탑의 근본적인 원리 보다는 갑룡의 천부적인 미적 감각이 뛰어 났던 것이며 이러한 조형 의욕이 작품으로 형상화 하였을 것이다.
그는 또한 고된 작업에서도 자기의 뜻이 공간속에 이루어져 가는 탑들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조화속에 도취되고 법설과 무아지경 속에 고달픔을 잊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후의 걸작을 남겼을 것이리라.
우리나라는 백제 때부터 석탑이 발달하여 신라에 이르러 더욱 많이 축조되어 탑탑응행 (탑이 기러기처럼 줄서있다) 이라고 까지 말 했으며 고려를 거쳐 이조초까지 1300기의 탑이 쌓여져 우리나라를 "석탑의 나라" 라고 불러졌으나 이조 중엽에 이르러 억불숭유정책에 의하여 조탑이 자연 이루어지지 못했다.
서양에서도 사원 탑 건조가 중단되어 오다가 철재로 파리에 에펠탑이 세워질 때 마이산 일각에 백여기의 탑군이 신비롭고도 화려하게 축조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동서양을 통하여 근세에 조탑은 거의 이루어 지지 않을 때 마이산 탑과 같은 년대에 건조된 파리의 에펠탑을 들을 수 있다.
이 두 탑을 대조해보면 매우 흥미롭다, 프랑스 대혁명의 백년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1889년에 8백만푸랑의 거액을 드려 300 상공에 철재탑을 완성시켜 예술의 도시, 파리를 상징하고 세계에 과시하고 있다. (석탑의 문화재로서의의 논문중에서)
그러나 마이산 석탑은 단돈 백원의 예산도 없이 적수공권으로 이 만불탑을 이룬 것이다. 석정은 축조를 완성한 후 에도 수도와 기도생활로 일관해 왔으며 영의 경지에 더욱 도달하여 60대에 불가사의의 신명 글을 남겨 놓았다.
30여권에 이르는 이 대부서는 밤에 기도 하면서 영의 계시를 받아 쓴 것으로 책자 조주 예한자등 기본형에 필획이 가감된 형태의 보통 사람이 도저히 판독 불능의 문자로서 생전에 이 글을 밝히지 안했으며 이 신명글은 영의 계시에 의한 통달한 사람이 나오면 이글을 알게 될 것이란 유언이 있었다.
참고로 말하면 석정은 세속의 문자와 접한 것이 적었고 그리 사용한 적이 없었다한다.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30여권의 신서를 남기었는지? 신서의 내용뿐 아니라 석정은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기도하는 시간을 축내지 않으려고 무답무어로 대답을 멀리 했다. 또한 소문을 듣고 제자 되기를 자원하여 찾아온 사람이 있어도 허락한 적이 없고 어쩌다가 다른 사람과 자리를 같이한 경우에도 도무지 말이 없었다 한다.
또 전주 관성묘에 가서 관성장군 사당에서 기도를 올리셨다고 한다. 마이산에서 힘들고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플 땐 항상 관성 장군사에 묻고 대화를 했다 한다.
어느 은천리 누군가가 갑룡을 비판하고 다니고 탑사에서 그릇을 흠쳐가면 그 괴로움을 관성 장군상에 물으니 그놈을 내가 죽여주랴? 하고 물으니 갑룡은 그러지 말고 그냥 혼을 내주어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해달라고 하자 그 다음날 부터는 그가 자리에 누워 시름시름 알고 있었다. 그러자 자기가 갑룡에게 잘못을 뉘우치고나니 병이 나아졌다고 한다. (전주 관성장군 성전 대표 대담)
갑룡은 유․불․선중에 선 주장으로 통합 종교로써 일관했고 삶의 생활은 유교 바탕으로 수련은 도교의 바탕으로 기도는 불문의 바탕으로 경전에도 가까이 하셨다 한다.
40세 중반에 고금당 굴사에 기도 갔다가 어느 여인과 음양 합일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같이 탑군에 와서 정수물을 뜨고 혼례식을 올렸다 한다. 그 후 자식 3형제를 두고 얼마 안되 최씨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다시 50후반부터 혼자서 살았다고 한다. 자식 3형제 중 생계가 어렵고하니 아들이 없는 남원 어느 집에 양자로 보내고 차남이 도생씨가 갑룡의 뒤를 이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삼남은 장성해서 완주로 가서 터를 잡고 후손을 내렸고 차남인 이도생씨가 탑사를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옛 어른말로는 암마이산과 숫마이산의 중턱에 강목천을 묻고 산을 왔다 갔다 하면서 솟금령 영신합이라 글을 쓰고 천을 타곤 했다 한다. 낮에는 돌을 구분 하면서 날랐고 밤 자시마다 하루에 한층식 올렸다 한다.
천지탑과 같은 타원형탑은 둥근원형 나선형 방향으로 쌓아 올라가다. 계단식인 조금씩 튀어 나오게 하여 원형계단을 이용해서 오르고 내려왔고 상단부위에 잔돌을 70cm높이로 차분히 올려서 그 위에 널판 돌을 올렸다고 한다.
상단부위에 잔돌사이에 사각모양으로 나무를 대고 그 위에서 축지법으로 몸에 기공을 넣어서 몸을 가볍게 만들고 돌을 오렸다 한다. 꼭대기 부처님 머리 돌을 올리기 위하여 백일동안 기도하고 천신에게 기공으로 매달려 마지막돌을 올렸다고 한다.
천지탑은 만 3년이 걸렸다고 한다, 탑이 완성되면 내려오면서 사각우물 정자모양의 나무대를 철거하고 돌망치로 툭 튀어 나온 계단형 돌을 쳐서 들어가게 하면서 내려왔다고 한다.
천지탑은 음․양으로 나누어졌는데 보는 쪽에서 좌측이 음이고 우측이 양이다. 돌덩이 자체는 밑에부터 음으로 시작해서 위 칸은 양이고 음양, 음양순으로 이루어져 서로의 흡입력 때문에 비 바람이 몰아쳐도 넘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상판의 널판돌은 음은 14기 양은 15기 음은 짝수이고 양은 홀수로 표현했다고 한다.
천지탑앞에 오방탑을 세우고 오행을 상징하듯 우뚝 서있다 천지탑을 위해 지지하는 오방탑은 천지의 지․수․화․풍, 사대와 자신의 몸체를 말한다. 그리고 천지탑주변 일렬 신장탑들은 천지탑을 보호하는 신군장들로 32기의 장수의 탑이다. 천지탑을 보호하고 마군위 칩입을 막기 위함이니 어느 마군이 침입을 할 수 있겠는가.
천지탑아래 갑룡의 처소를 잡고 기도실과 방사를 만들어 생활의 거처로 삼았다. 대웅전아래 용궁이 있고 앞에 중앙탑이 있는데 (일명:흔들탑) 이렬의 신장으로 탑사의 정중앙에서 기준을 삼고 있다고 한다. 바람에 흔들거려도 넘어지지 않고 굳굳이 잘 흔들린다고 해서 별명이 흔들탑이다.
일렬 중앙탑에는 작은 신장탑들이 보호하고 있고, 꼭 하늘을 치솟아 오를듯한 경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우측에는 내공단 외공단이 있고 작은 용궁단이 바로 밑에서 자리하고 있다. 갑룡 좌상옆에 앞에 일광탑이 있고 좌상앞은 약사탑이 있고 암 바위옆으로 월광탑이 있다. 일월은 이 사바세계의 세월을 나타내듯 인간의 세월을 보여 준다. 그 중 약사탑은 인간의 육체적인병, 정서의병 등의 병고를 쾌유케 하기 함이다.
탑군은 우주의 축소판이며, 인간의 삶의 현장이라 하셨다고 한다 ,묘법연화경 15품에 나오는 연화의 세계임이오 하늘을 찌를 듯한 기상이다. 항상 백두루마기를 거치고 백의민족의 얼을 배움의 터전으로 삶을 살았다고 한다.
95세 때 일이다 갑룡은 아무 말도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자 후손들은 관을 짜고 초상을 치루는데 36시간 만에(일일반)다시 일어나시며 죽음을 잘못 정 했다고 하여 다시 살아 나셨다가 97세 때부터 단식에 들어가 일년동안 용궁의 물만을 마시며 몸속의 이세상의 사물의 이치를 씻어내고 있었다
아들은 뭐라도 드시고 기운을 차리기를 원했지만 갑룡은 절대로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인간의 모든 때를 씻고 몸속에 똥오줌을 완전히 제거해서 깨끗한 마음과 몸으로 이 세상과 하직하고 싶고, 내 몸이 정화가 되어야 이 세상에서 수도한 내가 조상을 찾아 갈 수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시고 용두봉 산위에 자리를 정하시고 98세로 눈을 감으셨다.
묘자리에 완전히 바위로 된 산을 어떻게 묻을까 걱정 하면서 후손들은 정상에 올라가서 그곳을 파보니 진 찰흙이 깊이도 나왔다고 한다.
그곳에 잠든 갑룡은 지나가는 너희를 돌봐주고 행인을 돌봐 주겠노라고 했다. 가파른 정상위에 자리한 묘소는 산을 3고개를 넘어야 오를 수 있다. 멀리서 보고프면 암 마이산 정상에서 남서쪽으로 내려다보면 이갑룡의 묘소가 보인다.
오로지 인간의 구제와 짖는 죄를 대신 속죄 하고자 기원과 기도로 일관 하시다 가신 갑룡은 30여년의 축조탑과 신서만을 만기고 1957년 1월 9일에 몸을 보내고 탑사 모든 곳에 갑룡의 혼이 숨을 쉬면서 찾아오는 이들을 격려와 축원으로 인도하면서 계시는 듯 하다.
출처 : http://www.maisantapsa.co.kr/ (일부, 잘못 쓴 글과 띄어쓰기를 수정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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