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살기

가슴을 울리는 면앙정 송순의 한시

무당 거미 2022. 7. 29. 08:06

가슴을 울리는 면앙정 송순의 한시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1493~1582)은 당대 최고의 격조 높은 시인이었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草廬三間)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淸風) 한 칸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송순 상춘가(傷春歌)

“꽃이 진다하고 새들아 슬퍼마라

바람에 흩날리니 꽃의 탓 아니로다

가노라 희짓는 봄을 새와 무삼하리오”

송순은 이 시조에서 희생당한 사림들을 낙화에 비유했다. 

 

꽃이 진다고 슬퍼마라-송순 면앙정

사화 피바람 부는 조정 피해 낙향
담양을 두고 누정(樓亭)과 원림(園林), 가사 문학의 본향이라고 한다. 그 매력적인 문화의 뿌리엔 면앙정(俛仰亭)이 있다.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의 제월봉으로 오르는 높다란 언덕 앞엔 면앙정이라 새겨진 커다란 석비가 서 있다. 여기서 언덕을 올려다보면 면앙정의 기와지붕이 보일 듯 말 듯하다. 
송순(宋純, 1493~1582)은 1533년 자신의 고향인 담양 봉산면 제월봉 오르는 길목에 면앙정을 지었다. 그의 나이 41세. 불혹을 갓 넘긴 시절이었다. 송순은 90세까지 장수했으며 50년 동안이나 관직 생활을 했다. 27세 때인 1519년 빼어난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해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출사(出仕)했다. 그런데 그해 겨울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 개혁파가 훈구파에 의해 크게 화를 입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 이 사건은 송순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한양에서 관직 생활을 하던 송순은 1533년 김안로(金安老) 일파가 조정을 쥐락펴락하자 미련 없이 벼슬을 내려놓고 담양으로 낙향했다. 그때 면앙정을 지었다. 3년 남짓 자연과 함께 시를 짓고 마음을 다스렸다. 은일(隱逸)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1537년 김안로가 사약을 받고 실각하자 곧바로 홍문관 부응교에 제수되어 관직에 다시 나아갔다. 이후 경상도 관찰사, 사간원 대사간을 거쳐 50세인 1542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1533년 송순이 지은 면앙정은 임진왜란 때 부서졌고 1654년 후손들이 다시 지은 뒤 몇 차례의 수리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사진=이광표]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다. 윤원형(尹元衡) 일파에 의해 많은 사림들이 화를 입자 송순은 상춘가(傷春歌)라는 시조를 지었다. “꽃이 진다하고 새들아 슬퍼마라/바람에 흩날리니 꽃의 탓 아니로다/가노라 희짓는 봄을 새와 무삼하리오” 송순은 이 시조에서 희생당한 사림들을 낙화에 비유했다. 눈 밝은 사람이면 거기 담긴 비유와 메시지를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었다. 여기저기서 이 노래가 불렸고 그로 인해 송순은 큰 변을 당할 뻔했다.
1550년엔 대사헌, 이조참판에 올랐으나 사론(邪論)을 편다는 죄목으로 충청도 서천으로 귀양을 가야 했다. 귀양에서 풀려난 송순은 1552년 60세 때 면앙정을 개축했다. 몇 차례의 부침을 겪었으나 송순은 1569년 77세에 의정부 우참찬에 이르렀다. 이때 그는 관직에서 물러났다. 1519년에 출사했으니 무려 50년 만이다. 이후 90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송순은 면앙정에 머물며 줄곧 시문과 풍류를 즐기면서 강호가도(江湖歌道)의 담양 가단을 구축했다.

 

면앙정에서 내려다본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 일대. 멀리 영산강이 흐른다. [사진=이광표]

1550년대에 송순은 면앙정에서 ‘면앙정가’를 지었다. 면앙정 주변의 풍광을 감상하고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마음을 노래한 것이다. 도가적 풍류적 삶이라 할 수 있다. 이 가사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신선이 엇더턴지 이 몸이야 긔로고야/강산풍월 거늘리고 내 백년을 다 누리면/악양루 샹의 이태백이 사라오다/호탕(浩蕩) 정회(情懷)야 이에서 더할소냐/이 몸이 이렁 굼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
그 뜻은 이렇다. '신선이 어떤 것인지, 이 몸이야말로 신선이로구나. 강산 풍월 거느리고 내 평생 다 누리면 악양루 위의 이태백이 살아온다 한들 넓고 끝없는 정회야 이보다 더할쏘냐. 이 몸이 이렇게 지내는 것도 역시 임금의 은혜이시도다.' 자연친화적, 도가적, 풍류적이지만 그래도 임금의 은혜를 칭송하며 유교적으로 마무리했다. 당시 세상의 도리를 지킨 것이다.
‘면앙정가’는 정극인(丁克仁)의 상춘곡(賞春曲)과 함께 호남 가사문학의 원류로 평가받는다. 내용과 형식 등에서 정철(鄭澈, 1536~1593)의 성산별곡(星山別曲)에 영향을 주었고, 정철은 이에 힘입어 담양 땅에서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등을 창작했다. 면앙정과 송순은 이렇게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본격적인 시발점이다. 또한 담양이 '한국 가사문학의 최고봉'의 명성을 얻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담양 출신의 송순은 학자이자 관료였으며 넉넉하고 풍류 넘치는 예인이었다. 특히 음률에 밝아 시가에 능했다고 한다. 이런 기질이 4음보의 가사문학을 창작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면앙정’ 편액. 16세기 명필 성수침의 글씨로 전해온다. [사진=황호택]

1552년 송순은 면앙정을 개축했다. 그의 나이 60세 때였다. 송순은 이렇게 기뻐했다. “하늘을 쳐다보기도 하고, 땅을 내려다보기도 하며 바람을 쐬면서 남은 생애를 보내게 되었으니 나의 본래 원하던 바를 이제야 이뤘다.”

 

<출처 : https://www.ajunews.com/view/20211219082513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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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순

宋純수초(遂初), 성지(誠之), 기촌(企村), 면앙정(俛仰亭), 숙정(肅定)
시대출생사망유형직업성별분야본관
조선
1493년(성종 24)
1582년(선조 15)
인물
문신
문학/고전시가
신평(新平 : 지금의 충청남도 당진)

요약 조선전기 한성부좌윤, 한성판윤, 의정부우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수초(遂初) 또는 성지(誠之), 호는 기촌(企村) 또는 면앙정(俛仰亭). 담양 출신. 증 이조판서송태(宋泰)의 아들이다.

생애와 활동사항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를 시작으로 1520년(중종 15)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마친 뒤, 1524년(중종 19)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가 되고 1527년(중종 22)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533년(중종 28)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잡자, 귀향하여 면앙정을 짓고 시를 읊으며 지냈다.

송순은 1537년(중종 32)김안로가 사사된 뒤 5일 만에 홍문관부응교에 제수되고, 다시 사헌부집의에 올랐다. 이어 홍문관부제학, 충청도어사 등을 지냈고, 1539년(중종 34)승정원우부승지에 올라 4월 명나라의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오자 선위사가 되어 서행(西行)하였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사간원대사간 등의 요직을 거쳐 50세 되던 해인 1542년(중종 37)윤원형과 황헌(黃憲) 등에 의하여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547년(명종 2)에는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중종실록』을 찬수하였다. 그해 5월에 주문사로 북경에 다녀와 개성부유수가 되었다.

1550년(명종 5) 대사헌·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진복창(陳福昌)과 이기(李芑) 등에 의하여 사론(邪論: 도리에 어긋난 논설)을 편다는 죄목으로 충청도 서천으로 귀양 갔다. 이듬해에 풀려나 1552년(명종 7)선산 도호부사가 되고, 이 해에 면앙정을 증축하였다.

이 때 기대승이 「면앙정기」를 쓰고 임제(林悌)가 부(賦)를 쓰고, 김인후(金麟厚)·임억령(林億齡)·박순(朴淳)·고경명(高敬命) 등이 시를 지었다. 이후 전주부윤과 나주목사를 거쳐 1562년(명종 17) 70세의 나이로 기로소(耆老所 : 조선시대에, 70세가 넘는 정이품 이상의 문과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에 들고, 1568년(선조 1)한성부좌윤이 되어, 『명종실록』을 찬수하였다.

이듬해 한성판윤으로 특별 승진하고 이어 의정부우참찬이 된 뒤, 벼슬을 사양하여 관직생활 50년 만에 은퇴하였다. 송순은 성격이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특히 음률에 밝아 가야금을 잘 탔고, 풍류를 아는 호기로운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일찍이 박상(朴祥)과 송세림(宋世琳)을 사사하였고, 교우로는 신광한(申光漢)·성수침(成守琛)·나세찬(羅世纘)·이황(李滉)·박우(朴祐)·정만종(鄭萬鍾)·송세형(宋世珩)·홍섬(洪暹)·임억령 등이 있다. 문하 인사로는 김인후·임형수(林亨秀)·노진·박순·기대승·고경명·정철(鄭澈)·임제 등이 있다.

면앙정은 그가 41세 되던 해인 1533년(중종 28) 담양의 제월봉 아래에 세운 정자로서 호남 제일의 가단(歌壇)을 형성하였다. 여기에는 임제·김인후·고경명·임억령·박순·이황·소세양(蘇世讓)·윤두수(尹斗壽)·양산보·노진 등 많은 인사들이 출입하며 시 짓기를 즐겼다.

면앙정가단은 그 후에 나타난 호남의 성산가단(星山歌壇), 영남의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노가재가단(老稼齋歌壇) 등의 선구이며, 영남의 가단이 전문 가객 중심이라면 면앙정가단은 사대부 출신의 문인 가객이 중심이었다.

특히 송순은 벼슬에서 물러나 강호생활을 하면서 자연예찬을 주제로 한 작품을 지음으로써 강호가도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으며, 「면앙정삼언가」·「면앙정제영(俛仰亭題詠)」 등 수많은 한시(총 505수, 부1편)와 국문시가인 「면앙정가」 9수, 「자상특사황국옥당가(自上特賜黃菊玉堂歌)」·「오륜가」 등 단가(시조) 20여 수를 지어 조선 시가문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문집으로는 『면앙집(俛仰集)』이 있다. 담양 구산사(龜山祠)에 신주가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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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중종실록(中宗實錄)』
  • ・ 『명종실록(明宗實錄)』
  • ・ 『선조실록(宣祖實錄)』
  • ・ 『견한잡록(遣閑雜錄)』
  • ・ 『패관잡기(稗官雜記)』
  • ・ 『순오지(旬五志)』
  • ・ 『지봉유설(芝峰類說)』
  • ・ 『죽창한화(竹窓閑話)』
  • ・ 『호남가단연구』(정익섭, 진명문화사, 1975)
  • ・ 『국문학전사』(이병기·백철, 신구문화사, 1957)
  • ・ 『한국시가사강』(조윤제, 을유문화사, 1954)
  • ・ 「임란전후가사연구」(김동욱, 『진단학보』25·26·27, 19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