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강남 1970 (2014)

무당 거미 2015. 1. 24. 18:30

강남 1970 (2014)

 

 

 

 

 

 

 

 

 

 

 

 

 

 

 

 

 

 

 

 

 

 

 

 

 

 

 

 

 

 

 

 

 

 

 

 

 

 

 

 

1970년, 강남땅을 향한 위험한 욕망이 춤추기 시작한다!
호적도 제대로 없는 고아로, 넝마주이 생활을 하며 친형제처럼 살던 종대(이민호)와 용기(김래원). 유일한 안식처였던 무허가촌의 작은 판자집마저 빼앗기게 된 두 사람은 건달들이 개입된 전당대회 훼방 작전에 얽히게 되고 그 곳에서 서로를 잃어버린다.

“땅 종대, 돈 용기! 끝까지 한번 가 보자!”
3년 후,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 준 조직 두목 출신 길수(정진영)의 바람과 달리, 잘 살고 싶다는 꿈 하나로 건달 생활을 하게 되는 종대. 정보와 권력의 수뇌부에 닿아있는 복부인 민마담(김지수)과 함께 강남 개발의 이권다툼에 뛰어든 종대는 명동파의 중간보스가 된 용기와 재회하고, 두 사람은 정치권까지 개입된 의리와 음모, 배신의 전쟁터. 그 한 가운데에 놓이게 되는데…

이영화의 키워드 : 배신

[ Preface ]

모든 창작자에게는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맞닥뜨린 핵체험이 있게 마련이다. 나에게는 강남이 공간과 시간, 이중의 의미에서 그런 원체험에 해당한다.

1974년, 이사를 와 처음 맞닥뜨린 강남은 농경문화와 도시문화가 극단적으로 충돌하는 기이한 공간이었다. 강남 개발 붐이 일면서 신식 양옥집과 황토색 황금물결, 다 쓰러져가는 집들이 공존했고, <말죽거리 잔혹사>에 나온 모교 또한 이주민과 원주민의 자식들이 책상을 나란히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원주민이었던 친구들이 더 남쪽으로 밀려나 자퇴 또는 퇴학의 형태로 학교를 떠났다.

등굣길에 학생과 넝마주이로 만났던 순간들. 이후 거리의 부랑자로 불리게 된 그 친구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말죽거리 잔혹사>가 끝날 무렵에 하게 되었다. 그러다, 강남 개발 계획의 정치적 비사를 소개하고 있는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서 <강남 1970>은 내게 구체적 실체를 띠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돈이 지상 최고의 가치가 된 한국의 천민 자본주의. 그 양극단의 맨 얼굴이라 할 수 있는 넝마주이와 오렌지족을 다 강남에서 만났고, 그 극단의 사이를 계속 걸어가면서 경계인으로서 시도 쓰고 영화도 만들었다.

군사문화의 폭력성이 지배했던 사춘기, 수컷 되기와 남성성을 강요 받았던 고등학교 이래 <말죽거리 잔혹사>를 통해 제도 교육이 어떻게 폭력성을 키워내는가를 다뤘고, <비열한 거리>에서 돈이 형님이 되는 사회, 돈이 폭력성을 어떻게 소비하는가를 다뤘다면 <강남 1970>은 권력이 폭력을 소비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거리 3부작’을 관통하는 주제는 여전히 폭력성과 청춘이라는 두 가지 테마의 공존과 충돌, 중심에 편입되지 못하고 거리에서 배회할 수 밖에 없는 뒤틀린 청춘의 초상이다.

감독 유 하




[ ABOUT MOVIE ]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그리고 <강남 1970>
유 하 감독의 10년에 걸친 거리 3부작 완결!

<강남 1970>으로 유 하 감독의 10년에 걸친 ‘거리 3부작’이 완결된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제도교육의 폭력성에 유린되는 청춘들을 그린 지 10년. <비열한 거리>로 돈이 폭력을 어떻게 소비하는 지를 보여준 지 8년 만이다. 유 하 감독의 거리 시리즈 완결편인 <강남 1970>은 강남땅의 개발이 막 시작되던 1970년대를 조명한다. 고아 출신의 두 젊음, 종대와 용기는 강남땅을 둘러싼 이권다툼의 최전선에서 정치권력의 행동대원이 되어 목숨을 걸고 싸운다. 그렇게 <강남 1970>은 가진 것 없는 청춘이 폭력과 만나는 드라마로서 거리 시리즈의 주제 의식을 3부작 중 가장 큰 스케일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에서 부의 상징이 된 서울 ‘강남’을 무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강남 3부작’이자, 가진 것 없이 모든 것을 가지고 싶었던 청춘들의 초상이라는 점에서 ‘청춘 3부작’이기도 한 ‘거리 3부작’. 유 하 감독은 <강남 1970>으로 10년에 걸친 그 대장정에 드디어 마침표를 찍는다.


스타를 배우로 재탄생 시켰던 유 하 감독, 이민호-김래원의 만남!
땅과 돈을 향한 욕망으로 질주하는 거친 남자들, 스크린을 누비다! <강남 1970>

이민호와 김래원이 달라진다. 유 하 감독은 이미 <말죽거리 잔혹사>의 권상우와 <비열한 거리>의 조인성 등 젊은 남자 스타들을 배우로 재탄생 시킨 바 있다. 그는 이번 <강남 1970>에서 이민호와 김래원을 땅과 돈을 향한 욕망으로 질주하는 거친 남자들로 탈바꿈시켰다.
유 하 감독은 드라마 속 재벌 상속자로 익숙한 이민호를 가진 건 싸움 실력 밖에 없는 밑바닥 청춘 김종대로 파격 캐스팅했다. 그는 이민호라는 배우를 목숨 건 리얼 액션의 한 가운데로 밀어 넣었다. 매서운 눈빛으로 분노하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강남 1970>의 이민호에게선 사랑 앞에 눈물 짓던 그의 모습을 더 이상 떠올릴 수 없다. 스크린을 종횡무진 누비는 이민호의 거친 남성성은 낯설지만 반가운 매력으로 가득하다.
김래원 또한 뒤를 돌아보지 않는 행동력과 치열한 조직 세계에서 성공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백용기로 복합적인 매력을 선보인다. 세상이 멸시하는 넝마주이에서 조직의 2인자가 되기까지 늘 긴장하고 불안해하는 감정연기와 실제 실력행사를 하며 보여주는 리얼 액션 연기까지 <강남 1970>의 배우 김래원은 또 한번 도약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강남 1970>은 이민호, 김래원이라는 젊은 두 남자 배우의 변신을 지켜보는 쾌감을 큰 스크린으로 선사할 것이다.


목욕탕 액션, 전당대회 액션, 창고 액션 등 리얼 액션 퍼레이드 <강남 1970>
촬영 기간 1주일, 연인원 150명! 몸과 몸으로 진흙탕에서 대역 없이 맞붙는다!

“어떤 영화든 액션은 드라마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유 하 감독의 액션 연출 원칙은 <강남 1970>에서 더 큰 스케일의 ‘날 것’ 냄새 생생한 액션 신들로 발전했다. 종대와 용기가 반대편 조직원들을 쳐 나가는 과정의 액션 장면은 그 어떤 감정 신보다 더 비릿하고 묵직한 여운을 안겨준다. 또한, 야당 전당대회에 동원된 건달들이 기물을 파손하고 깽판을 치는 시퀀스는 각목과 쇠파이프가 난무, 실제 건달들이 할 법한 현실적인 몸싸움을 보여준다.
<강남 1970>의 ‘생존이란 절박한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액션 시퀀스’들 중 백미는 공동묘지에서 이뤄지는 ‘진흙탕 액션’이다. 유 하 감독은 스토리상 두 남자의 운명에 큰 획을 긋는 이 장면에서 진흙탕을 목숨 걸고 뒹구는 남자들의 처절한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했다. 이에 제작진은 담양의 야산을 헌팅, 1달 여 땅을 고르고, 그 위에 흙을 덮는 작업 등을 통해 공간을 만들었다. 사실적인 액션을 위해 스테디 캠을 선택, 롱 테이크로 촬영은 진행되었고, 연인원 150여 명의 배우들이 하루 12시간씩 꼬박 일주일 간 비 내리는 진흙탕 속에서 촬영했다. 대역 없이 촬영이 진행된 탓에 배우들은 끊임없는 부상과 진흙 독으로 병원을 오고 가야 했고, 한 테이크 촬영이 끝날 때마다 “부상자 없습니까?”가 연출부의 고정 싸인이 되었다. 이민호가 발톱이 들리는 부상을 당했음에도 마취제 주사를 맞아가며 촬영을 감행한 것은 <강남 1970>의 배우들이 리얼 액션을 탄생시키기 위해 어떤 전쟁을 치렀는지 잘 보여주는 예이다. 적과 아군이 구분 되지 않을 정도로 비가 뿌려대고, 걷는 것조차 쉽지 않은 진흙탕 속에서 이민호와 김래원을 비롯한 모든 배우들은 온 몸으로 뒹굴고 날아올랐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옥상 액션, <비열한 거리>의 굴다리 액션에 이어 <강남 1970>의 시그너처 신으로 기억될 만한 ‘진흙탕 액션’은 그렇게 탄생되었다.
한국
청소년관람불가 | 2015.01.21 개봉 | 1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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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기 전에 알아 두어야 할 것들>

 

[강남 1970] 보러 가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

알고 보면 더 재밌고 모르고 봐도 상관없는 <강남 1970>에 대한 이야기를 모아봤다.

1. 문학과 영화

시인 유하는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던 해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이라는 시로 문예중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을 비롯하여 <무림일기>,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등등 여러 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그는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연극영화학 석사를 마친 후, 자기의 시를 모티브로 한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를 장편 영화로 만들어 감독 데뷔했다. 소설가 이창동이 <그 섬에 가고 싶다>의 시나리오를 쓰고 조감독을 맡아 영화계에 입문한 것과 같은 해다. 두 번째 장편영화를 찍기까지는 8년이 걸렸지만 이후로 대략 3년에 한 편씩 꾸준히 영화를 만들고 있다. <강남 1970>은 그의 일곱 번째 장편영화 연출작이다.


2. 폭력 3부작

유하 감독의 영화들 가운데 2004년 작 <말죽거리 잔혹사>, 2006년 <비열한 거리>, 그리고 <강남 1970> 까지 세 편을 ‘거리 3부작’ 혹은 ‘폭력 3부작’이라고 부른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는 1978년의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하여 군사 정권의 제도교육이 어떻게 폭력성을 키워내는가를 다뤘고, <비열한 거리>에서는 2000년대 중반의 철거깡패를 통해 돈이 어떻게 폭력성을 소비하는가를, <강남 1970>에서는 1970년대 초 정치깡패의 삶을 통해 권력이 폭력을 소비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각각의 시대나 캐릭터는 다르지만 항상 시스템에 의해 좌절된 청년의 욕망이 제도의 바깥을 향하게 되고, 폭력으로 분출되며 방황하거나 소멸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3. 강남 시리즈

유하 감독은 1974년에 서울로 이사했을 때, 논밭과 아파트 건설 현장이 공존하던 강남의 당시 모습을 인상 깊게 기억한다. 목가적인 소년 시절의 흔적은 사라지고 원주민이던 친구들은 더 남쪽 땅으로 쫓겨나다시피 떠났다. 그러고는 급작스럽게 기형적인 과정을 거쳐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바뀌어버린 이 욕망의 땅에서 그는 많은 것을 보았다. 그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압구정동이 배경인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지금의 양재역 주변의 옛 모습을 그린 <말죽거리 잔혹사>, 그리고 개발 이전의 강남을 그린 <강남 1970>까지, 강남이라는 공간 자체를 모티브로 삼은 작품을 꾸준히 만들어오고 있다.


4. 정치깡패

<강남 1970>의 종대(이민호)와 용기(김래원)는 얼떨결에 동네 건달 조직인 길수파의 ‘일’에 머릿수를 채워주기 위해 따라가게 된다. 그 일은 바로 야당의 전당대회를 방해하는 일이었고, 당시 정권의 직접적인 지시에 의해 벌인 일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종대와 용기는 헤어지게 되지만, 둘 다 정치 깡패의 길을 걷게 된다.

실제로는 1976년 5월, 유명한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사건이 있었다. 강경한 김영삼 신민당 총재 대신 온건파인 이철승 국회의원을 신민당의 새 총재로 선출시키기 위해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은 조직폭력배 김태촌을 사주하여 신민당사를 공격하게 했다. 이 때 김영삼 총재는 다리가 부러지고, 김태촌은 대의원 명단을 태우고 직인을 훔쳐갔다. 그리고는 얼마 뒤에 열린 새 총재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에서도 또 김태촌과 부하들이 난입했다. 그들은 각목을 휘두르며 김영삼 측 대의원들의 출입을 강제로 막고, 이철승 의원을 대표로 선출하게 했다.


5. 강남 개발과 투기

영화에서 독재 정부는 조만간 한강 이남을 개발하여 서울을 확장 이전하려 한다. 정식으로 이 계획을 공개하기 전, 500년을 이어온 수도를 확장 이전하는 명분을 구상하는 단계인데, 다음 대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건달들을 앞세워 개발될 땅을 미리 사들인다. 영화에서 이 계획을 주도하는 이는 중앙정보부장과 여당의 두 국회의원이다. 이들은 각각 영등포와 명동의 조직폭력배들을 거느리고 있고, 수원에서 올라온 작은 조직의 말단이던 종대가 우연히 이 정보를 가지고 땅투기에 참여하면서 아전투구로 변한다.


6. 정부 주도의 강남 집중 개발

한강 이북의 서울이 북한의 사정권에 있다는 현실은 박정희 정권에게 강남 개발의 정당성을 확보해주었다. 1963년에 강남 일대를 서울시에 편제하고, 66년 ‘대서울도시 기본계획’ 전시회를 시작으로 본격 강남 개발이 시작되었다. 1968년 김신조 사건과 미 해군 푸에블로함 납치사건으로 안보에 대한 불안감이 극에 달하면서 강남 개발은 더욱 빨라질 수 있었다.

불도저식으로 추진한 경부고속도로와 제3한강교(한남대교) 건설이 69년에 완성되었다. 이 공사가 진행되면서 서초구의 주 시가지가 마련되었다. 1970년부터는 영동 제2지구 구획정리사업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사업에 의해 상공부와 산하 12개 단체가 이전 입지하게 되어 삼성동에 한국전력공사, 그 건너편에 한국무역진흥공사가 자리잡게 되었다. 또 이 사업 촉진을 위해 논현동에 영동 공무원 아파트 입지가 조성되고, 다음으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가 건설되게 된다.

1972년에는 서울 지하철 1~5호선의 노선 계획이 확정되는데, 원래 영등포부터 왕십리까지 계획되었던 2호선이 영등포부터 대림, 사당, 영동, 잠실을 잇는 순환선으로 변경되었다. 1970년대 중반 이후로는 이전 명문고로 불리던 고등학교들을 강남으로 이주시켰다. 명분은 도심 교통난 완화였고, 유인책으로는 저렴한 학교용지 불하, 각종 시설과 세제 지원책 등을 썼다. 1976년에는 경기고가, 1978년에는 휘문고가 이사하면서 이후 80년대에 숙명여고, 서울고, 중동고 등 거의 대부분의 명문고가 강남으로 이전해 지금의 8학군을 형성했다.


7. 넝마주이

종대와 용기는 아마도 전쟁 고아다. 둘은 고아원에서 만나 형제처럼 자라왔다. 가족뿐 아니라 주민등록번호도 없는 두 청년은 사회의 극빈층이었다. 수원 변두리의 개천가에서 고물을 주워 팔며 생활해야 했다. 이들은 ‘넝마주이’라고 불리웠다. 쓰레기 수거, 재활용 시스템이 전근대적이던 1970년대 이전, 아무렇게나 버려진 쓰레기들 속에서 재활용이 가능한 고물을 모아 팔며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로, 리어카 대신 망태를 등에 지고 집게를 들고 다니며 고물을 수집했다. 노숙자나 거지들과는 달리 버젓한 거처가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사람들에게는 기피의 대상이었다.


8. 이민호

<꽃보다 남자>, <상속자들> 등의 드라마를 통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귀공자로 큰 인기를 누리는 이민호는 이 영화에서 수염도 제대로 깎지 않은 검게 그을린 얼굴의 정치 깡패로 자신의 이미지를 바꿨다. <강남 1970>은 이민호의 첫 영화 주연작인데, 일각에 잘못 알려진 것처럼 영화 데뷔작은 아니다. 구준표로 급부상하기 전, 강우석 감독의 <강철중: 공공의 적 1-1>과 <울학교 이티>에서 주요 배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강철중>에서 맡은 하연이라는 역할은 학교 문제아들 중 한 명이었다가 이원술(정재영)의 조직에 ‘취직’하여 조직 폭력 범죄에 휘말리는 캐릭터였다.

9. 김래원

김래원은 데뷔 초부터 서글서글하고 선한 인상으로 로맨틱 코미디나 청춘 멜로물의 단골 남자 주인공이었다. 가장 큰 인기를 얻었던 작품은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와 <어린 신부>였다. 그런데 <어린 신부> 이후 김래원의 작품들은 이전과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2005년 <미스터 소크라테스>, 2006년 <해바라기>와 함께 <강남 1970>의 용기 역할은 벌써 그의 세 번째 조직 폭력배 연기다. 일각에 또 잘못 알려진 것처럼 <강남 1970>이 그의 5년만의 영화 복귀작은 아니다. 2009년 <인사동 스캔들> 이후 <마이 리틀 히어로>라는 영화가 있었지만 저예산 영화여서 홍보가 많이 안되었고 흥행 성적이 저조해 덜 알려졌을 뿐이다.

10. 개봉 이모저모

영화는 4개월 반에 걸쳐 촬영했으며 촬영 회차는 95회에 달했다. 후반부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는 묘지터 패싸움 장면은 150명이 동원되어 하루 12시간씩 꼬박 1주일간 찍어 완성한 장면이다. 개봉 전 <강남 블루스>라는 가제로 알려졌으나, 개봉을 11월로 예정하면서 지금의 제목으로 바꿨다. 이후 관객이 적은 11월보다 관객이 많이 드는 1월로 개봉일을 연기했다.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의 핸디캡을 안고 있으면서도 1월 넷째 주 개봉작 중 가장 예매율이 높았으며, <허삼관>, <오늘의 연애> 등이 주춤해지면서 700개에 가까운 스크린을 확보해 개봉 첫날 15만 명의 일일관객수를 기록했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국제시장>은 가장 많을 때 전국 966개의 스크린에서 상영되었었고, 같은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으로 63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했던 <아저씨>의 개봉일 관객수는 13만 766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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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윤지원

 

ps. 평점 6.5   강남1970은 건달들의 이야기이다. 가난한 시절의 사람들과 정치꾼의 이권다툼과 권력을 지향하며 펼쳐지는 난투극이다. 또한 가끔씩 18금의 장면이 나온다. 건달들의 싸움은 잔인하다. 죽이고 결국 죽는다. 이런 류의 영화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영화속에 나오는 음악들만 기억에 남을 것이다. 특히나 좋아하며 요즘도 즐겨 듣는 필리핀 가수 프레디 아길라Freddie Aguilar “아낙 Anak  이다. 기타의 전주곡과 단조롭지만 애절한 곡조가 마을을 끌어 당긴다. 이 노래는 어린시절 골목을 걸으며 흥얼거리던 곡이다. 나중에는 정윤선이 "아들"로 개사하여 불러서 쉽게 따라 부르기도 하였다.    

  1970~80년대 어린시절을 보내며 들었던 혜은이 “제3한강교” 와 이장희 나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의 노래도 영화속에 나온다. 내용은 별로이지만 노래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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