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어놓은 스타킹
나희덕
지치도록 달려온 갈색 암말이
여기 쓰러져 있다
더 이상 흘러가지 않을 것처럼
생의 얼굴은 촘촘한 그물 같아서
조그만 까끄라기에도 올이 주르르 풀려 나가고
무릎과 엉덩이 부분은 이미 늘어져 있다
몸이 끌고 다니다가 벗어놓은 욕망의
껍데기는 아직 몸의 굴곡을 기억하고 있다
의상을 벗은 광대처럼 맨발이 낯설다
얼른 집어들고 일어나 물속에 던져넣으면
달려온 하루가 현상되어 나오고
물을 머금은 암말은
갈색빛이 짙어지면서 다시 일어난다
또 다른 의상이 되기 위하여
밤새 갈기는 잠자리 날개처럼 잘 마를 것이다
가지고 다니는 통장, 은행에서 제공하는 투명비닐 앞면에 윗부분이 낡아 떨어지고 있는 신문지조각
꾸깃꾸깃 신문지를 펼지면
나덕희 시 "벗어놓은 스타킹"이 있다.
오래 전부터 가지고 다니던 통장에는 모래알이 빠지듯
예금액은 줄어들고, 부어도 부어도 늘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이 한편의 시가 감동을 주듯 언제가는 가득할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산다.
'시와 나의 넋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꿈속의 넋 - 이옥봉 (0) | 2022.07.19 |
---|---|
시 한편 소개 "단순하게 느리게 고요히" (0) | 2022.04.16 |
참깨를 털면서 김준태 (0) | 2021.10.29 |
유품정리사도 울었다. 세평 방 27살 청년이 남긴 캐리어 사연 (0) | 2021.09.09 |
퇴직자의 인사말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0) | 2021.08.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