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約束)
며칠 전이였다. 논을 직선으로 가로 질러 기계가 들어가서 작업하기 쉽게 또 모판작업을 하는 논으로 만들어 놓았던 논이다. 직선을 만들어 남은 자투리는 밭으로 사용하였다. 그런 그곳에 하수오를 심어서 몇년째 재배하고 있었다. 그곳에 약을 칠 수도 없고, 오직 손으로 잡초를 뽑아야 했다. 비록 작은 면적이지만 낮에 작업한다는 것은 등줄기에 땀이 주르륵 흐르게도 한다. 잡초를 뽑다가 검은색의 둥근 것을 발견하였다. 돌이나 흙덩이를 주워내다가 눈에 띄였다. 모양이 너무 둥글어서 밖으로 던지려다가 보니 둥근 원형의 쌍가락지였다. 검은 색으로 제 색깔을 잃어버린 모양이다. 열심히 일하는 나에게 하늘에서 사색을 하라고 소재를 주었다. 생각해 보았다. 누군가 이 논에서 일하던 주인이거나, 도와주었거나, 지나가던 분이였거나, 여자분이 약지나 중지에 끼워졌던 반지가 빠지고, 수십년 또는 일생이 지나갔거나 아니면 나의 할머니 그 누군가의 할머니, 그 윗 분일 수도 있다. 생각하게 하였다. 꼬꼬재배를 하고 귀 하였던 가락지를 섬섬옥수 손에 가지려니 끼워 한평생 잘 살아보자고 약속하였던 손,부귀영화를 누리며 한평생 오손도손 잘 살아 보자던 약속의 손가락에서 벗어나 버린 애물.
논 모둥이에서 주인을 잃어버리고 기다리던 시간.
사랑의 징표가 되어 아름다운 날을 기약하던 여인의 손, 아쉽게 잃어버린 세월처럼 검은 색의 어두움.
가문의 손을 이으며 보릿고개, 십이월의 칼바람도 이겨내며, 된장국에 호박이며 감자를 썰어 넣던 손, 저고리의 옷고름을 고쳐매던 거치른 손에 약속이 이렇게 고정 시켜버렸다.
집에 와서 닦았다. 서서히 제 색깔을 나타내고 있다. 은반지 같다. 오랜세월의 사연들을 내게 말해주는 듯한 본 질, 제 얼굴의 모양을 조금씩 내게 털어 놓았다.
난, 그 둥근 원안에 갖힌 주인의 삶을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난 아버지의 대를 이어 때로는 여유롭게 흙을 대하고 있지만 그 반지의 주인은 먹고 살기 힘들어 땀이 콧등으로 흘리며 허리를 굽혀 젖은 논바닥에서 눈물처럼 흘렀을 수도 있거나, 어린모를 움켜잡고 남편과 가족을 생각하며 힘든 것보다 내일을 꿈꾸며 한손 한손 모를 찌며, 희망을 심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떠나신지도 벌써 25여년이 지났다.
지금 내 나이보다도 젊었던 나이에 떠나가신 어머니의 엄지 손가락이 생각난다.
굵고 짧은 엄지손가락이 여동생에게 유전되어 특이하게도 오래 기억되었던 손이다.
아버지가 떠나신지도 벌써 4년여 세월이 흘렸다. 본격적으로 논에 발을 담근 것이 벌써 10년의 농사 경력이 되었다. 그 전에는 논뚝이나 수확기에 힘이 필요하여 도와 드렸던 것이지만 모두 손가락으로 꼽으면 짧은 세월은 아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손은 원형의 틀안에서 세월의 역겨움으로 온갖 어려움을 예상하는 듯한 흔적이 있다. 무엇인가 얼마나 움켜쥐었거나 충격을 받은 것인지 반지에는 상처가 있었다.
내 손에 올려진 누군가의 약속에 나는 내가 지키지 못했던 약속을 생각하게 한다. 어머님이 살아 생전 두쪽의 금반지가 마지막 병원비가 되리라 간직하였던 것이 어느날 없어져 버렸다. 병원비가 없어서 낙담하던 시간들이였다. 하늘만 쳐다 보게 하는 절망의 시간들이였다. 무엇이든 해야되겠다는 생각이 짓누르던 시절이였다. 결국 그 반지는 찾지 못하고 어머니의 낙심어린 표정을 나는 보았다. 비장미를 느끼던 어느날인가 난 긴급하게 일자리를 구해야 했고, 그곳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되었던 반쪽의 하늘이였다.
지금 내 손에 얹어진 인생을 빠져 나온 약속!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어머니를 보내야만 했다.
오늘 이 반지를 보면서 생각한다. 닦으면 점점 윤이 나는 반지를 보며 점점 내 생각이 또렷해 진다.
벌써 오래전 이야기인데도~
약속 [約束]
- 1.장래의 일을 상대방과 미리 정하여 어기지 않을 것을 다짐함
- 2.미리 정하여 어기지 않고 함께 하기로 다짐하다
유의어
권약(券約), 입약(立約)...권약(券約), 입약(立約)
약속
논두렁 옆 작은 자투리 밭
직선으로 잘라놓아 밭이 되어
흙을 다지는데
둥근 쌍가락지 하나 있었다
은반지인 듯한
세월이 묻어 검게 퇴색되어
가름할 수 없지만
누군지 모를 여인의 손에서
빠져나온 모양이다
손가락에 끼워
약속했던 그 누구와의 행복이
작은 논 귀퉁이에 묻혀
잊혀져 버렸다
찬물에 손 안 담그고
자식들과 호강하며 행복하게 살자고
그렇게 말했을 것이라
살펴보니 반지 아래쪽에 눌린 상처하나
얼마나 움켜잡아서
깊게 패인 흔적이 남았을까
논뚝 길을 걸으며 반지를 만져본다
집으로 가는
저녁길이 점점 어두워진다
이필원 - 약속 (1974) https://www.youtube.com/watch?v=U-aq-4klhDU
https://www.youtube.com/watch?v=ch-MO5bDQ9o
그 반지사진을 멋있게 찍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