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나의 넋두리

공백이 뚜렷하다 - 문인수

무당 거미 2012. 2. 3. 14:46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bestbright?Redirect=Log&logNo=100150074447 >

< 동아일보 2012. 2. 2. A21면 상부 / 게재되어 있음 >

 

 

공백이 뚜렷하다 / 문인수

                                          

해 넘긴 달력을 떼자 파스 붙였던 흔적 같다.

네모반듯하니, 방금 대패질한 송판 냄새처럼 깨끗하다.

새까만 날짜들이 딱정벌레처럼 기어나가, 땅거미처럼 먹물처럼

번진 것인지 사방 벽이 거짓말같이 더럽다.

그러니 아쉽다. 하루가, 한 주일이, 한 달이

헐어놓기만 하면 금세

쌀 떨어진 것 같았다. 그렇게, 또 한 해가 갔다. 공백만 뚜렷하다.

이 하얗게 바닥 난 데가 결국,

무슨 문이거나 뚜껑일까

여길 열고 나가? 쾅, 닫고 드러눕는 거?

 

올해도 역시 한국투자증권,

새 달력을 걸어 쓰윽 덮어버리는 것이다

 

 

                                                      문인수 시인

 

1945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1985년 <심상>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1996년 제14회 대구문학상, 2000년 제11회 김달진문학상, 2003 제3회 노작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 <늪이 늪에 젖듯이>(심상. 1986) ,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문학아카데미, 1990) , <뿔>(민음사, 1992) , <홰치는 산>(만인사, 1999) , <동강의 높은 새>(세계사, 2000) <쉬>(2006년 문학동네) <배꼽> (2008. 창비)가 있다 

[출처] http://blog.naver.com/gulsame?Redirect=Log&logNo=50082063969

 

  좋은 시를 소개하고 싶다.  

  하루, 이틀, 이렇게 시간이 가는 것이 쌓여 달력을 찢고, 세월을 찢으며, 흘러가고 있다. 집안 벽 한쪽에 나타난 세월의 흔적에 가슴을 저리게 하는 시다. 시인의 섬세한 관찰력과 상상력이 돋보인다.